생각보다 큰 크기에 놀랐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사람도 많았다.
관객석 제일 뒤에서 보니 더 커보이는건가.
이런 둥근 형태의 투기장에서 벌어지는 쌈박질을 보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 줄은 몰랐다.
“아들아. 적당한 때에 데리고 돌아가자. 가능한 조용히 가고 싶구나.”
옆에서 아버지가 나지막히 말씀하셨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보다 더 키가 커서 미묘하게 내려다보게 되는 것 같다.
“어머니는 만족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투기장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가녀린 쪽이 어머니란다. 투구를 뒤집어쓰고 전신에 가죽 갑옷 같은 것을 둘러서 얼핏 보기에는 성별 구분이 안된다.
투기장의 제일 상석에는 노스트리아 제국의 귀족들로 보이는 자들이 보였다. 좋아 보이는 과일과 술을 먹으며 뭐가 좋은지 히히덕거리고 있었는데 참 꼴보기가 싫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투기장에서 놀고먹느라 바쁘다니.
곧이어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어이가 없으리만큼 쉽게 결판이 났다. 주고받은 한 번의 칼놀림에 어머니가 밀려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기 시작 전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상대는 오 싸울줄은 아는 놈인가. 딱 그랬다. 몸 상태만 좋으셨다면 저 정도는 가지고 노셨을텐데. 밥을 안줬나.
관중들이 시끄럽게 야유를 보냈고 이긴놈은 귀족석을 올려다보았다. 귀족석 가운데에 아마도 가장 높은 귀족으로 보이는 자가 무덤덤하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망할놈.
“먼저 데리고 가겠으니 당신 아내의 뒤처리는 직접하쇼.”
말을 마치고 관객석 앞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 ‘허 그 새끼 참...’ 같은 말이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는데 뭐... 모르겠다.
뒤집어 쓰고있던 긴 후드를 벗자 주변에서 놀란 관중들의 소리가 또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뭐... 모르겠다.
칼을 치켜들어 마무리를 하려던 놈 앞쪽으로 등 뒤에 있던 도끼를 집어 던졌다. 도끼가 두 사람 사이에 큰 소리를 내며 박히고 모레먼지가 일었다. 관객석에서 뛰어내려 후다닥 먼지속으로 내 도끼를 향해 달려갔다.
“켁 켁 켁 ... 이건 무슨 ...”
모레 먼지가 걷혀가면서 놈이 기침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칼을 머리위로 든 자세로 기침을 하다니. 위험한 놈일세.
나는 대륙 공용어를 잘 모른다. 아버지가 잔소리를 하시며 똑바로 배워두라 하셨지만 흥미가 없었다.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던 놈은 칼을 내리고 다시 귀족석을 올려다 봤다. 나도 올려다 봤다. 무덤덤하던 가운데 귀족놈이 뭐가 좋은지 웃고 있었다. 사람 죽이라고 명령할 때는 무덤덤하더니 그걸 방해하니 웃고 있다. 저놈도 위험한 놈인가보다.
“왕이 웃고 자빠졌으니 미안하게 되었네.”
뭔지 모르겠는데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근데 왜 칼을 나한테 겨누지? 해보자고? 뒤에서 어머니의 놀란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밥 좀 먹고 싸우지 그러셨어요.”
작게 어머니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뭐.
앞에 있던 놈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오. 제법 괜찮아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단지 너무 느리고 너무 힘 없이 휘두르는게 문제다.
땅에 박혀있던 도끼를 뽑아 휘둘렀다. 도끼는 칼을 깨부수고 놈의 목과 어깨 사이 근처까지 갔다. 여기서 멈추자. 조용히 가자고 하셨으니.
“헉... 컥... 컥...”
이놈은 켁 헉 컥 같은 이상한 소릴 자주 낸다. 양손으로 피가 나오지 않게 목과 어깨 사이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난다. 그냥 닿기만 했는데. 그렇게 심하지도 않은 상처인데. 죽이려던 놈이 죽기는 싫은가 보네.
위에서 옷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방금 켁헉컥이 뒷걸음질 친 위치에 그 귀족놈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오기 전에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저 멀리 관객석 뒤편에서 아버지가 내려오고 계신다. 내가 내려올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관객석이 투기장보다 높은 곳에 있었네. 밑에서 보니 그런가. 내 할 일이나 하자.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면 내 할 일은 끝이다.
투기장에 귀족이 내려오자 관객석 입구에서 병사들이 몰려나왔다. 놀란 관중들은 그 입구로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관객석은 병사들로 가득했다.
“나는 남쪽 대삼림의 곰부족 족장 베아벡이다.”
아버지가 먼저 귀족에게 말을 건냈다. 자기 소개를 하는 듯 하다. 공용어를 잘하시네. 오늘따라 지진으로 갈라진 것 같은 모양을 가진 얼굴의 흉터가 유난히 늠름해 보이신다.
“짐은 대 노스트리아 제국의 왕 엔드리트 4세다.”
아 이 사람이 왕이다. 여유로운 웃음이나 자세가 그럴듯하다. 근데 여기는 노스트리아 남쪽 끝에 위치한 곳인데 왕은 보통 나라의 가운데 어디 쯤에 있지 않나.
“짐이 행차한 행사를 방해 하였지만 짐은 관대하다. 관대히 용서 하겠노라.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으라.”
뭐라고 떠들고는 있다.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웃는지 모르겠다. 기분은 좋아 보이니 그냥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순간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손이 도끼로 향하는걸 보자마자 뒤로 돌아 어머니를 한 팔로 안고 달렸다.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도끼가 이쪽으로 날아온다. 안 그래도 올라가서 병사들을 뚫고 나갈지 저 철벽을 뚫고 나갈지 고민이었는데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목에 메달릴수 있게끔 자세를 바꿨다.
“죽고싶...”
뒤에서 왕이 하는 말이 들려왔는데 뭐. 내 할 일부터 신경 쓰자. 곧이어 아버지의 도끼가 철문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아버지의 도끼는 왕을 지나쳐 곧장 철문을 뚫고 통로의 어둠속으로 달아났다. 나도 곧장 통로로 뛰어들어 돌로 된 땅에 박힌 아버지의 도끼를 낚아챘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끝이다.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야만족이여.”
“가족과 무사히 돌아가겠다. 관대롭지 못한 왕이여.”
노스트리아의 왕 엔드리트 4세가 대삼림 곰부족 족장 베아벡을 향해 손짓하자 관객석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화살들이 베아벡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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